떡밥위키
최근 변경
최근 토론
특수 기능
파일 올리기
작성이 필요한 문서
고립된 문서
고립된 분류
분류가 되지 않은 문서
편집된 지 오래된 문서
내용이 짧은 문서
내용이 긴 문서
차단 내역
RandomPage
라이선스
IP 사용자
216.73.216.107
설정
다크 모드로 전환
로그인
개인정보 처리방침 개정 안내
프랑스 침공
(r1 문단 편집)
닫기
RAW 편집
미리보기
=== 연합군의 국지적 역습, 그리고 됭케르크 === 5월 19일, 마침내 할더는 끈질긴 설득 끝에 히틀러에게서 대서양 연안까지의 자유로운 진격을 마침내 승인받았다. 할더는 벨기에 방면의 16기갑군단과 39군단의 지휘권을 [[헤르만 호트]]에게 넘겨 기갑군 규모의 기동부대를 편성했고, B집단군이 격렬한 공세를 통해 연합군을 붙들어 둔 사이 기동부대는 대서양 해안까지 진격하기 시작했다. 할더는 이 진격 당시를 회상하며 "당시 우리는, 혈통 좋은 명마가 기수에게 고삐를 잡혔다가 갑자기 입에 물린 재갈이 풀려 결승선으로 질주해 승리한 듯한 느낌이었다."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됭케르크로, 호트 기갑집단은 아라스로 격렬히 질주하며 연합군의 후방에 쐐기를 박아넣고 있었다. 다만 이 과감한 진격으로 인해 기갑집단의 선두와 후위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발생했는데, 특히 아라스 일대에서는 폭 40km 정도의 회랑이 형성된 상태였다. 연합군이 이 일대를 친다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문제는 이 순간에서조차 연합군은 그 찬스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5월 18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A집단군을 가로막고 있던 프랑스 제2군, 6군, 9군은 무너졌고 대서양으로 질주하는 독일군 앞에 놓인 프랑스군은 편성 중에 있던 3선급 부대였다. 혼비백산한 프랑스군 예비부대들은 이를 찌르지 못하고 오히려 사기 충천한 독일군에 의해 분쇄되어 버렸다. 같은 5월 19일, 가믈랭 장군은 작전명령 12호를 발령해 북동부 전선 사령관 조르주 장군에게 독일군 제대의 간격으로 '''기동성을 갖춘 특수 임무 부대'''의 진격을 명령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구체적인 계획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명령문에 적힌 요구 사항은 "모든 것은 1분 1초에 달려 있다."라는 추상적인 문장뿐이었다. 문제는 이 날 가믈랭이 보직에서 해임되고 74세의 노장 [[막심 베이강]]이 그 자리에 올랐다는 것. 베이강 역시 1차대전식 전쟁관의 소유자였고, 직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가믈랭의 즉각적인 역습 지시를 취소해 버렸다.[* 그리고 명령 취소 뒤 베이강이 한 일은 신임 내무장관 예방, 벨기에로 직접 날아가서 군 사령관/벨기에 국왕 예방이었다.] 베이강이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진격을 재개한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은 솜 강을 도하해 캉브레와 페론을 점령했고 다음날인 20일 1기갑사단은 아미앵을, 2기갑사단은 영국군 50사단 25여단을 격파하고 솜 강 하구 아브빌(Abbeville)을 점령했다. 호트의 15기갑군단 역시 진격을 개시해 같은 날 아라스 남쪽 [[캉브레]]가 제 7기갑사단의 손에 떨어졌다. 결국 베이강의 결정은 벨기에의 연합군을 포위하려는 독일군의 시도를 용인한 꼴이 되어버렸다. 한편, 우왕좌왕하는 프랑스군에게 인내심의 한계에 이른 영국 육군 총참모장 에드워드 아이언사이드 장군은 [[아라스 전차전|독자적으로 작전권을 행사해 아라스 일대에서의 역습을 감행하기로 했다]]. 아이언사이드는 영국 대륙원정군 사령관 고트 장군과 함께 1집단군 사령관 비요트 장군[* 참고로 스톤(Stonne) 전투에서 B1 전차 1대를 이끌고 독일군 전차 13대를 격파한 피에르 비요트가 이 사람의 아들이다.][* 이 와중에 아이언사이드가 역습에 소극적인 비요트의 멱살을 잡기까지 했다. 본래 아이언사이드의 목적은 고트로 하여금 프랑스군과 함께 아미엥 방면으로 반격을 가해 후퇴하는 거였으나, 고트의 답변은 영국 원정군을 포함한 1집단군 사령관 비요트가 '''8일'''간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아이언사이드의 반응은... 한편 이 꼴을 접한 [[막심 베이강]]은 아이언사이드의 따귀를 때리고 싶었다고 적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을 방문해 역습 계획에 합의했다. 이는 최종적으로 1개 기갑여단이 증강된 영국군 2개 사단과 프랑스군 2개 사단, 거기에 1경기계화사단을 다시 배속받은 기병군단이 포함된 대대적인 반격이었다. 앞선 안뉘 전차전에서 양군의 교환비를 생각하면, 이 작전은 당시 독일군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비요트와 1군 사령관 블랑샤르가 작전의 전권을 5군단장 알트메어 장군에게 위임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언사이드와 알트메어가 생각한 역습의 시점이 들어맞지 않았다. 아이언사이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5월 21일'''에''' 공세를 시작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블랑샤르는 알트메어에게 5월 21일'''부터''' 공세를 시작한다고 기재한 명령문을 보냈고, 알트메어는 5월 22일에나 준비가 완료된다고 보고한 것이다. 결국 5월 21일의 [[아라스 전차전|아라스 역습]]은 사실상 영국군 단독 작전이 되어버렸고 제7 기갑사단의 1차 방어선을 돌파하고 7기갑사단의 남측방에 위치한 SS 무장친위대 토텐코프 사단을 패퇴시키며 항상 전선에서 전차를 타고 돌아다니던 롬멜과 7기갑사단의 지원부대를 몰살시키는가 했지만 88mm 대공포를 동원해 방어선을 급조한 7기갑사단과 슈튜카의 폭격에 60대의 전차를 잃으며 처참히 패배한다.[* 총통의 경호대인 무장친위대 그것도 토텐코프가 패퇴했다는 것에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이 당시 무장 친위대 사단들은 훈련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국방군보다 좋은 기갑장비를 배속받고 전투력이 올라간 것은 1943년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이때 롬멜은 공군의 전과까지 자신의 전과로 포함하는 등 연합군 전력을 상당히 과장한 전투 보고서를 제출했고[* 영국군은 총 88대의 전차를 투입했고 전투 후반부 지원 온 프랑스군 전차까지 합하면 최대 170여대의 전차가 동원되었는데 롬멜의 전과 보고서는 배로 기재되었다.] 이는 후술할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5월 22일, 허망하게 3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베이강은 역습 작전이 기재된 베이강 계획을 발표하나... 처칠의 표현을 빌리자면 베이강의 새로운 명령은 폐기된 가믈랭의 제12호 명령과 비교했을 때 그만의 열정적인 어투 외에는 딱히 다른 점이 없었다. 그마저도 솜 강 남변의 3집단군이 제대로 된 역습을 실시하지 않으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군도 순탄하지 않았는데 전날, 롬멜의 아라스 전투 보고에 경악한 히틀러와 룬트슈테트 그리고 클루게는 아라스 일대 연합군을 완전히 해결하기 이전까지 진격을 일시 중지 시키는 일이 발생한다. 이 일로 A집단군 기갑사단들은 중지 명령이 철회되는 22일 정오까지 시간을 허비했고 오후 늦게 독일군은 [[칼레]], [[불로뉴]],[[됭케르크]] 방면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 어느 전투에도 휘말리지 않았던 라인하르트의 15군단이 21일 시점 됭케르크에서 50km 떨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을 몰살시킬 첫번째 기회를 날려먹었다. 5월 23일, 프랑스군은 당일 예정된 역습을 계속 미루다가 결국 취소해버렸다.[* 이는 이틀전 비요트 장군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발생한 지휘공백, 혼란이 원인이었다.] 한편 아라스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BEF의 고트 장군은 프랑스군에 대한 신뢰를 접고 전 부대를 대서양 해안으로 퇴각시킬 것을 명령했다. 5월 24일, 독일군은 북프랑스 일대의 항구 대부분을 장악한다. 이때 연합군이 통제하는 항구라곤 오로지 됭케르크뿐이었다. 독일군은 아 강(Aa)을 도하해 북프랑스 해변을 따라 북상하고 있었고 칼레와 불로뉴는 독일군에 포위당해 절망적인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불로뉴는 25일 함락되었고, 칼레는 26일 함락되었다. [[윈스턴 처칠]]과 영국군 공식 2차대전사를 편찬한 라이오넬 엘리스는 이들의 저항이 됭케르크의 기적을 만들어냈다고 적었지만 포위전을 지휘한 구데리안과 [[전격전의 전설]]을 저술한 칼 하인츠 프리저는 오히려 21일부터 22일 정오까지 내려진 정지 명령이 결정적이었다고 반박했다. ] 연합군 주력이 됭케르크 동쪽에서 독일군 B집단군과 격전을 치르느라 묶여 있었기에 됭게르크로 패주한 연합군들은 꼼짝없이 남쪽에서 다가오는 독일 기동부대에 의해 포위섬멸 당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바로 기적이 벌어진다. 됭케르크로 진격하고 있던 독일군이 갑자기 정지해 버린 것. 바로 히틀러가 또다시 진격 중지 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아라스 전투에서의 영국군 기갑사단의 역습은 히틀러와 룬트슈테트의 걱정에 휘발유를 들이부었고 23일 룬트슈테트와 클루게의 간격 조정명령과 다음날 오전 히틀러가 직접 정지명령이 연이어 하달되었다. 자세한 정황은 [[됭케르크 철수작전]] 항목 참조.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명령에 당연히 A집단군은 뒤집어 졌다. A집단군 예하 부대들은 룬트슈테트와 히틀러의 정지 명령을 맹렬히 비난했고 야전 사단들은 시시때때로 잡은 찬스를 방해하는 집단군 사령부에 대해 강한 환멸감을 전투일지에 기록할 정도로 드러냈다. 할더, 브라우히치 등 독일군 참모부의 핵심 인사들도 매우 강력하게 반발했다. 할더는 A집단군의 지휘부와 참모부에 대해 자신의 5월 23일자 일기에 '''능력이 충분한지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지 대단히 의문스럽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강한 불신을 드러내었고 그 동안 할더에게 작전 실시 권한을 위임했던 브라우히치는 23일 기갑사단들이 편제되어 있는 제 4야전군을 B집단군으로 배속시킨다는 명령을 하달해 '''룬트슈테트의 작전통제권을 박탈하여''' B집단군 사령관 보크 상급대장에게 넘겨줘버렸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펄쩍 뛰었다. 히틀러는 룬트슈테트의 시선에 동의한다며 정지명령을 하달했고 간신히 엎질러지기 직전의 물을 주어담고 있던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히틀러를 설득하여 명령을 취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히틀러는 요지부동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건 룬트슈테트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 정지명령의 책임을 '''히틀러에게 물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정지명령은 전적으로 '''클루게와 룬트슈테트의 간격 조정을 위한 정지명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연합군이 됭게르크 일대에 방어선을 어느 정도 구축하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주력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한 5월 26일에야 정지 명령은 비로소 취소되었다. 3일 8시간 가량의 정지 명령이 연합군을 완벽한 몰락으로부터 구원한 것이었다. 독일군이 본격적으로 3일 후 공세를 시작하였을 때는 외곽 방어를 맡은 프랑스군이 튼튼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하였고 정지 기간 동안 됭케르크 일대에 비가 내리면서 기동로 역시 상태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독일 해군은 한달 전 북해에서 벌어진 나르비크 해전에서 제해권을 확보하는 대신 상당수의 구축함을 잃으며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런 상태의 해군을 철수하는 영국군 수송선을 공격하기 위해 보낸다면 영국 해군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해군 전력을 그대로 가져다 줘버리는 셈이었다.결국 공격의 주축은 공군으로 정리하겠다며 호언장담한 괴링의 뜻대로 독일 공군이 되었지만 영국 왕립공군이 결사항전을 벌이며 괴링의 뜻대로 공군 만으로 해상에서 철수하는 영국군을 전멸시키는데에 실패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독일군의 입장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 말은 육군 총참모부 서방육군분석과장으로 재직하던 울리히 리스 소장[* 1944년 12월 기준. 침공 당시의 신분은 중령이었다.]이 남긴 말이다.[* 됭케르크철수가 실패했다면이라는 전제는 2차 대전을 연구하는 군사학자들과 밀덕들 사이에서 여전히 열띤 토론을 부르는 존재다. 당시 영국은 1938년부터 공군을 위주로 차차 재무장을 시작했던 터라 육군이 매우 약했고 프랑스에 보내진 20만 명의 원정군이 영국 육군의 핵심이자 사실상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다 섬멸했다면 영국은 독일과 협상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홈 네이비로 독일 상륙군을 원천 봉쇄했을 것이고 전쟁의 흐름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물론 주류학계는 영국이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선전하기 힘들었겠지만 강력한 홈네이비와 왕립 공군력으로 독일의 영국 침공을 봉쇄했을 것이라는 의견에 손을 들어준다. 다만 저 30만 명은 영국의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 숙련병들이 몰려 있었던 정예라서 저들을 상실한 상황에서 육성한 군대는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원 역사가 병장 10명에게 신병 100명을 던져준 상황이었다면 영국 원정군을 상실한 상황에서는 병장 1명에게 신병 300명을 던져주는 상황이니...]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
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CC BY-NC-SA 2.0 KR
또는
기타 라이선스 (문서에 명시된 경우)
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216.73.216.107)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
사용자
216.73.216.107
IP 사용자
로그인
회원가입
최근 변경
[불러오는 중...]
최근 토론
[불러오는 중...]